
이 회색도시에서 당신을 …
병명은 알 수 없음
W. 민경
빗소리가 들렸다. 밤새 열어놓은 창문으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쉬지 않고 떨리는 손을 잡았다. 약, 약이 어딨지. 약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자기 전에 먹었던 게 마지막이었다는 걸 그제야 떠올리고 이불에서 기어나왔다. 갈증을 해소해야했다. 질식할 것만 같았다. 겨우겨우 냉장고를 열어 한 모금 남은 물을 털었다. 빗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음성이 섞인 소리였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였고, 그 물은 내 심장까지 내려갔다. 차가웠다. 식도부터 그 차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둘러싼 세상 같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물병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물병은 쓰레기통까지 가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었다.
여자는 오랜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죽음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사람들이 겪는 병이었다. 사람들은 그 병을 보고 사랑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절망이라고 하기도 했다. 여자는 자신을 패배자라고 칭했다. 남은 건 하나도 없다고 자조적으로 몇 번이고 혼자 남은 방안에서 중얼거렸다. 그 때마다 손에 쥐고 있던 가위는 찰칵 소리를 내었지만 아무것도 자르지 못했다. 여자는 죽고 싶었다. 동시에, 살아가고 싶었다. 살아갈 힘이 다 빠져버려 생각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가위가 찰칵 거리는 소리 틈으로 대문이 찰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죽어가는 몰골로 그곳을 돌아봤다. 한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서재호. 여자의 입에선 무미건조한 말이 흘러나왔다. 남자는 썩 유쾌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이 곳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건 나밖에 없었다. 여자는 가위를 던져 남자를 쫓아내려고 했다. 남자는 나가지 않았다. 왜 왔어? 시선을 아래로 돌리며 물었다. 잘 지내나 보러 왔지 시간이 많이 지났잖아 이제 너도 너의 삶을 살아야지. 언뜻 훈계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여자는 말없이 가위만 몇 번 딸각이다가 남자를 밀어냈다. 가. 서재호 씨가 참견할 거 없잖아. 그러나 남자는 물러나지 않았다. 가위 든 손을 가볍게 그러쥐며, 남자는 미정이가 맡겼던 걸 돌려주러 왔다고 말했다.
세상이 무너져도 살아갈 구멍은 있다. 오소리 같은 여자는 구멍인지도 모른 채 열심히 구멍을 파놨다. 흙을 파는 게 사랑인 줄 알았기 때문에 계속 흙을 퍼날라 사랑을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바보 같은 남자는 그게 제 무덤인 줄도 모르고 구멍을 넓혀갔다. 이게 사랑의 크기고 깊이고 전부고 전부 너야.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새빨간 거짓말, 나를 농락하려는 거지 속지 않아 진정한 사랑은 그 곳에 없으니까. 정작 없었던 건 나의 사랑이었다. 그가 퍼낸 흙으로 내 치부를 가리기 급급했던 내게 사랑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떠나 진정한 사랑으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내 가슴엔 구멍이 뚫려있다. 내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든 걸 했지만 정작 사랑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내가 살아가야하는 구멍에서 오롯이 나를 돌아본다. 그래서 나는 무얼 했지. 그래서 실패한 인생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한심한 여자일 뿐이었다. 그래서 끝까지 거부하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내가 파낸 구멍을 가진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고 더 이상 흙을 퍼내지 않았다. 사실 팔 흙도 없었다. 오소리는 애매모호한 구멍에 기댔다. 딱 맞아 떨어졌다. 자신이 덜어낸 사랑이 그제야 같아졌다.
아, 여기가 바로 내 무덤이구나.
본능적으로 느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이 한 몸 눕힐 작은 공간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힘을 풀고 땅 속으로 들어갔다. 아늑했다. 그제야 사랑이 뭔지 기억났다. 남자의 사랑은 강렬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간직할 수 있었다. 모두 태워먹은 나와는 달리. 나는 남자의 품에서 태고적으로 돌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여기였구나.
당신이 내 무덤이었구나.
서재호 당신이 바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