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회색도시에서 당신을 …
Memory -학교AU-
W. 시아
언젠가의 경치를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나날을 살피는 것으로 단촐한 일상을 시작한다. 지나가는 것이 인연이라고들 흔히 말하던가, 그렇게 시작하면서 만들어낸 일상의 경치는 제법 아름다웠고, 행복한 것이었다. 그런 행복한 일상을 당연히 보낼 수 있는 기회라면, 손에 꼽을 수 있는 일은 역시 아무 일 없이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경치를 보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경치를 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소녀는 볼펜으로 하얀 종이에 그림과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지만 흘러가는만큼 이리도 적게 흘러가는 것인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책상에 펜을 두드리던 혜연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흘렀더라. 시간도 시간이지만, 무엇보다 요즘 시간을 의미없이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공부나 시험의 압박으로 결코 힘들다거나,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었다.
또래 아이들과 유행이나 옷, 관심을 공유하다가도, 경감이라는 위치로 경찰의 수장답게 모두를 전두지휘하는 자신의 아버지, 권현석의 일정을 보고 혹여나 밥은 굶지 않을까. 하며 반찬이나 이번 음식은 무엇으로 할지 고민하는 것도 순전히 혜연의 몫이었다. '어른스럽다'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작 어른스럽다는 기준은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어낸 이야기라면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로 잘했다는 말을 남기고 싶을 정도였으니. 방과 후를 마친 뒤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선 혜연에게 함께 가자며 권유하는 친구들을 뒤로 하고 짐을 챙겨 밖을 나서는 모습에 효녀네, 늘 바쁜 사람이라는 둥의 별명이 생길 정도였다. 정작 당사자인 혜연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지만. 오늘의 일정은 반찬을 사고, 적절히 먹을만한 음식으로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익숙한 번호로 문자를 입력했다.
「딸이 해주는 거면 무조건 환영이지!」
문자만 받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은 그의 행동을 보며 웃음 짓던 혜연은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무슨 반찬을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음식으로 만드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결정한 것은 국물 요리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걷고 있던 순간에 부딪힌 누군가의 등에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올렸다.
“아, 죄송합니다. 집중하느라 보질 못했네요.”
“아뇨, 괜찮아요. 책을 보고 계셨던거군요?”
실타래보다 얇고, 은은하게 빛나는 은색은 눈이 부실만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 학교에서는 보기 어려운 색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혜연은 소년의 머리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속눈썹도 길고, 뭐랄까.. 신비로운 느낌이 더 강하다는 생각에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어느정도 알고 있었지만, 호기심 어린 여학생의 시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향한 곳은 카트에 담긴 반찬거리였다. 어린 소녀가 골랐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재료들을 살피던 소년 또한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하며 이내 입을 열었다. 그건, 저녁에 먹을 건가요?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버릇은 소년, 하태성에게 있어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성실한 학생회장이자 만능이라며 동급생들에게 혀를 내두를 정도의 이야기를 듣는 그였지만, 학교에서 나와 평범한 학생으로서 공부를 하고, 부모님의 기쁨을 위해 힘을 내는 것은 그의 유일한 낙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소녀는, 어떤 낙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어린 나이에 생각할 수 없는 진중한 생각을 속으로 삼키던 태성은 엉뚱한 질문으로 분명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라. 안경을 고쳐 쓰고 다음 대답을 기다리던 태성에게 혜연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빠도 장 보러 오신거 아니에요? 아. 정확히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마트에 들러 종이를 들고 들어온 참에 조금이라도 복습해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보고 있었으니, 정확히는 자신이 먼저 잘못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태연스러운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태성은 어머니의 심부름이라는 이유를 말했고, 듣던 혜연의 눈이 살짝 슬프게 웃고 있었던 것을 보고, 이어 말하지 못하던 태성에게 인사를 마치고 돌아섰다.
‘가족 모두가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혜연에게는 유일한 가족이 현석 뿐이었기에 단란한 가족을 꿈꾸는 일 또한 남들과 달리 새로울 수 밖에 없었다. 만난지 처음인 사람에게 이런 소리를 하는 건 실례겠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혜연의 뒤에 선 채 가만히 바라보던 태성은 혜연의 팔을 잡고 자신 쪽으로 돌아보게 한 뒤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캐릭터로 보이는 열쇠고리를 건넸다.
“어, 이걸 왜 저한테 주시는거에요..?”
“..전 받아도 쓸 일이 없어서. 혹시 좋아하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풉..! 오빠, 평소에 답답하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으세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열쇠고리를 주는 사람이 어딨을까. 있다면 바로 여기, 앞에 있는 당사자에게 자세히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가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용기를 냈는지 알 수 있었기에 열쇠고리를 받아들고 웃어 보였다. 기운을 주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방법 중에서 가장 소박하고, 마음을 알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혜연은 주머니 속에서 작은 사탕을 꺼내 태성의 손바닥에 올려두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의 어깨를 작게 두드리며 말했다.
“주신 답례로 이거, 드릴게요.”
* * *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어른이 아닌 학생 시절 두 사람의 만남이었다.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지금에 이르러, 그 날 간직하던 서로의 기억을 안고, 어긋나버린 현실에 다다랐을 때, 하나의 진실을 찾고자 노력하던 모습들 또한 한 편의 추억처럼. 겉옷을 여미며 호하고 불자 나오는 입김에 계절이 겨울임을 짐작 할만한 풍경이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곳곳에 눈이 내린 것에 일기예보에서는 강추위가 예상된다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던 기상 캐스터의 얼굴을 떠올리던 혜연은 품 속에 닿는 익숙한 금속의 느낌에 꺼내어 가만히 바라보며 웃었다. 설마, 그렇게 조우 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성중 경찰서에 들어간 것은 아버지인 권현석의 미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실력을 널리 인정 받고 있는 하태성 경위에 대해 알고자 함이었다. 여전히, 학생 때와 변함 없는 은색 머리칼과 안경, 그리고.. 차가워 보이는 인상 속에 담긴 따뜻한 마음을 혜연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설령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녹아서 없어진 사탕 뒤에 남겨진 열쇠고리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주머니에 부적처럼 넣어두고 다니고 있었다.
“정말 겨울이구나-..”
감기 걸린다며 잔소리를 아끼지 않는 주정재의 한 마디에 알겠다며 귀를 막는 시늉을 하던 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얗게 쌓인 풍경을 바라보았다. 잠깐 스쳐간 인연이라도, 분명 기억하고 있다면 그건 추억이 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오늘도 힘내자는 생각에 기지개를 키며 스스로에게 힘내자는 말로 하루를 시작하고자 부적이 되어버린 열쇠고리를 손에 꼭 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