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회색도시에서 당신을 …
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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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네르
언제나와 같은 지긋지긋한 일상은 삶의 의욕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젊은 청춘을 낭비하는 기분이란 그야말로 썩어가는 느낌인 것이다. 활력, 새로움, 변화. 이런 것들을 추구해야 할 판에, 틀에 박힌 형사 생활이라니! 그래도 이 나이에 번듯한 직장이 있고 밥 굶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는 정도는 되지 않나, 싶기도 하고. 꽉 막혀있는 계급단체의 일원으로서 끼어있으면서 항상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님은 알고 있다.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점에 안주하다가는 그대로 뇌가 굳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던 중에 권현석 경감이 이끄는 새로운 수사팀에 합류할 기회가 주어졌다. 막연히 동경하던 특별 수사팀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내 경찰 생활에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소문에 의하면 비밀리에 권현석 경감과 박근태 경무관이 '어떤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고, 수사팀은 그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어쩌면 큰 기여를 해서 특진을 할 지도 모르지. 물론 그런 기회가 있어야겠지만 확실한 것은 팀에 합류할 기회를 줬다는 부분은 내가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들뜬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왜인지 모르게 발걸음도 가볍다.
내근이고 외근이고 한시도 쉬는 날이 없다. 숨 돌릴 틈 없이 밀어닥치는 사건들로 수사에 매진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프로젝트'는 당최 진행 중이 맞는 건지도 의문이지만 그걸 생각할 겨를조차 주지 않는다. 지지부진한 삶에 진력이 났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바빠질 줄은 몰랐지!
오늘도 외근이었다. 수사팀 사람들은 계급을 막론하고 직접 현장에서 뛰어다녔다. 하나같이 굵직한 형사사건들에 팀원 한 명 한 명이 구원의 손길이나 다름없었다. 본격적으로 뭔가 진척되고 있는지, 권현석 팀장은 안경이 비뚫어진 것도 모른 채 쉴 새 없이 지시를 내리고 서류를 잔뜩 검토하고 있었다. 여름도 아닌데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오늘 드라이 좀 잘 먹었는데 또 부스스해지겠다. 외근이 삼 시 세끼인 형사의 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엔 현실이 너무 암울하다. 그래도 오늘은 용의자를 오전 중에 체포했고, 덕분에 점심 지나 여유가 생긴 참이었다.
"오 형사."
"네 경감님?"
여유를 누릴 틈도 정말 잠시구나, 하며 늘어지게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권현석 경감은 매우 난감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마치 심경을 대변하듯 배배 꼬였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난처하단 표정이세요?"
"얼마 전에 신입 하나 온다고 말 하던거 들었지?"
아, 신입. 얼핏 들었던 것도 같다.
"그, 교통과라던 사람이요?"
권현석 경감의 표정이 잠깐 환해졌다가 이내 난감한 색으로 돌아왔다.
"응, 그 사람 말인데, 지금 다들 바빠서 말야. 오 형사가 좀, 데려와 줬으면 해."
"네에에?"
아니, 신입이 애기야? 발이 없어, 눈이 없어, 입이 없어? 뻔히 수사팀 팻말이 대문짝...은 아니지만 붙어있는 데다가 1층엔 경비가 있을 텐데?
경감은 매우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나도 알겠는데, 길을 잃었다잖아."
"여, 여기서요? 성중서 내에서요?"
"그래."
살다살다 서 내에서 길을 잃는 형사를 보는 날도 온다. 진짜 다이나믹하네. 웃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나름대로 프로젝트의 주역들이랍시고 엘리트들을 뽑아 데려온다고 하지 않았었나, 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래, 엘리트가 길치일 수도 있지. 그러나 실제로 그 파란만장의 신입은, 단순한 길치 그 이상이었다.
*
"오미정 형사, 잠복근무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ㅅ, 서재호 형사, 지금 막 잠보……우욱."
"와… 나, 저 허당 진짜."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사람인지 모르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색하게 웃고 있는 권현석 경감을 바라보았다.
"경감님, 서 형사, 정말 쓸만한 인간 맞아요?"
서 형사는 우당탕 쿵쾅 사무실의 온갖 기물을 박살이라도 낼 기세로 튀어나가고 있었다. 어우, 진짜. 저 인간이 이 수사팀의 유능하신 인재라는 거 다 거짓말임이 분명하다니까!
"교통과 출신이 웬 차멀미를 저렇게 하냐?"
오는 내내 얼굴이 흙빛이었다. 불길하게 그르륵대는 소리를 내며 입을 틀어막은 서 형사에게 지금 차 안에서 토하면 버리고 가겠다고 엄포를 놓아 간신히 데려왔다. 정말로 눈물겨운 사투가 따로 없었다. - 그리고 그 결과가 저 토쟁이.
"하하, 뭐 그럴 수도 있지."
권현석 경감은 쓰게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말하는 어조에 힘이 없는 것이 뻔히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비칠대며 돌아오는 서 형사를 보며 작게 한숨쉬고 계시네.
지난 프로젝트를 엎어버린 주역이지만 교통과 출신의 토쟁이로 관할 서 팀장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아 올라오셨다니 할 말은 많아도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용의자를 체포할 기회를 노리던 잠입수사 와중에 요란하게 자빠질 게 뭐람. 덕분에 실패 징계도 받아보고 다시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하는 훌륭한 경험도 해 봤다. 대단한 엘리트 납셨어. 책상 위에 머리를 박고 괴로워 하는 꼴이 한심스러워 등짝을 후려쳐주고 싶었지만 입만 삐죽였다. 권현석 경감은 팀원들을 한 명 한 명 붙잡고 뭐라 이야기 하고 있었다. 아마 저 문제의 서 형사에 대한 것이리라.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 사람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로부터 시작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잇고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갔다.
*
"그러게 말이야, 내가 진즉 특종이다! 라고 했을 때 잡아 챘어야 하는 거였다고. 진실을 보는 눈! 사건의 돋보기! 그게 이 서재호 기자님의 별칭 아니겠어?"
게슴츠레 뜬 눈으로 자찬을 늘어놓는 서재호는 소주를 연거푸 들이키다 못해 한 병을 비운 채였다. 잔으로는 부족했는지 숫제 입에 병 주둥이를 들이밀고 마시고 있다. 저러다 또 토할 것을 잘 아는 사람이 하는 짓이다.
"큰 건 하나 잡았다고 기고만장해져서는. 아주 옥황상제 똥침을 놓겠네요, 서재호 씨."
어느덧 주름이 하나 둘 생긴 얼굴이 불쑥 앞으로 들이밀어졌다. 음냐음냐, 이상한 소리를 내며 코를 문지르더니 서재호는 비죽 웃었다.
"그래서 우리 오~미정 씨는 뭘 믿고 그렇게 이쁜가? 엉? 너무 이뻐서 옥황상제도 질투하겠는데~"
"이 양반이 술을 자셨으면 곱게 발 닦고 잠이나 잘 것이지 어디서 되도않는 술주정이야? 안통하거든요?"
"흑흑, 마음에서 우러난 진심을 어? 술주정으로 매도하고 그러면 슬퍼서 운다고. 엉엉."
그러더니 진짜로 엎어져서 울기 시작한다. 대체 이 남자는 뭐가 문제야?
"…"
"엉엉."
"아, 정말 버리고 가고 싶다."
"나 버리지 마, 오미정."
울던 얼굴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얼굴로.
"함부로 그런 소리 하지 마."
"하?"
"나 버리지 마, 미정 형사. 내가 잘 할게. 어? 믿어 줘."
"누가 버린다고 그래? 이제 그만 마시고 좀 가요."
축 늘어지려는 몸을 잡아 끌어 일으켜 세웠다. 나보다 덩치 큰 남정네는 어린애처럼 칭얼거렸다.
"꿈 속에서 항상 버리고 간다고. 안녕, 상일 경위님과 가야겠어. 안녕, 더 이상 살고싶지 않아. 안녕, 안녕, 안녕. 항상 다른 말로 넌 나를 떠나려고 해."
과거의 서재호와 현재의 서재호가 동시에 나를 돌아본다. 내 과거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현재를 불안해한다. 언제든 훌쩍 떠나버릴 맘이 든다면 그럴 수 있을 오미정임을 알기에, 지금의 나는 그를 꿈 속에서까지 괴롭히고 있나보다.
평소에는 말하지 않던 그의 속내는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타들어가 말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미안하면서도 미안하지 않다. 그는 내가 이런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나를 붙들어놨다.
코로 밀려들어오는 공기가 쓰게 느껴진다. 되돌아보면 후회와 죄책감으로 얼룩진 화상만이 떠돌아 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서재호는 그런 내 무언의 요구를 받아들여 절대 그 화제는 꺼내지 않았다. 술을 마시자고 한 것은 내쪽이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이 하고 있네.
"안 가. 안 가요, 안 버려."
"오미정이 거짓말쟁이인거 서재호는 다~ 아는데!"
"시끄러워요. 진짜 버리고 가버린다."
"넵. 주둥이 다물겠습니다."
못간다. 못버린다. 당신을 향한 이 감정이 언제 퇴색될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나는 그러지 않길 바라. 당신과의 첫 만남을 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어쩌면 계속 내 나침반은 당신을 가리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버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먼저 다가온 것이, 먼저 손을 내민 것이 당신이었기에 나는 먼저 떠날 수도 손을 쳐낼 수도 없음을 알았으면 좋겠어.
오미정은 거짓말쟁이.
이번에는 아니다. 꿈 속에서는 그럴 지 몰라도, 당신은 지금 나에게 유일한 구원이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