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회색도시에서 당신을 …
The Pin
W. 율아
[삐비비빅-삐비비빅-]
어두운 방 안에 날카로운 알람소리가 울렸다. 협탁 위를 더듬거리던 손은 알람 시계를 두드리듯 눌러 알람을 껐다.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켜자 달칵-하는 자그마한 소음과 함께 방 안에 짙게 깔린 어둠은 삽시간에 달아났다.
새벽 네시. 아직 기상시간은 두어시간 남짓 남아 있었지만 오늘은 일찍이 나서야했다. 화장대 위 놓인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몇 일간 숙면을 취하지 못한 탓일까. 늘상 생기가 돌던 얼굴은 어두운 빛을 띠고 있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보았다. 매끄럽던 피부는 거칠어져 버린 채 푸석하게 메말라 있었다.
" 피부가 이게 뭐람. "
그녀는 거울을 보고서는 툴툴거렸다. 창틀에서 새어드는 얕은 바람에 일렁이는 커튼을 걷어보았다. 어젯밤부터 시작된 비는 새벽이 되어서도 그칠 기미따위가 없었다. 가로등에서 뿜어지는 불빛이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들에 반사되어 어지러이 흩어졌다. 강재인은 인상을 쓰다 다시 커튼을 쳤다.
출근을 위해 가볍게 화장을 하고 난 강재인은 머리를 틀어 올렸다. 매번 하던 검은 머리핀으로 손을 뻗는 순간.
“ 아…. ”
손이 미끄러진 탓에 머리핀이 화장대의 뒤로 넘어가버렸다. 강재인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서 일어나 화장대 서랍 뒤로 손을 넣었다. 틈이 좁아 손이 겨우 들어갔다. 한참동안 손으로 바닥을 딛어보다 손 끝에 간신히 걸려든 머리핀을 쑥 끄집어 냈다. 머리핀을 화장대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아 머리핀을 다시 집어 든 순간.
“ ……? ”
자신의 손 끝에 딸려 나왔던 것은 검은 머리핀이 아닌 색이 잔뜩 바래버린 붉은 머리핀이었다. 뭐지,하고 생각하던 찰나 그녀는 머리를 감싼 채 화장대에 기대고 말았다.
“ 너 뭐야, 약속시간에 늦다니 정말 죽고 싶은 거야 ? 내가 귀한 휴가를 써가며 이렇게 나왔는데. 네 시간만큼 딴 사람의 시간도 소중히 할 생각 없어 ? ”
“ 뭐라는 거야. 만나자고 한 건 너였잖아. ”
“ 그래서, 지금 잘했다는 거야 ?”
“ 아, 그래 내가 죽일 놈이다. 가자, 어서. ”
눈을 흘기던 강재인은 휘적휘적 가던 정은창의 뒤를 따랐다. 어젯 밤, 오랜만에 휴가를 얻고 돌아가는 길에 정은창과 만났었다. 기분이 좋았던 강재인은 정은창에게 내일 뭐하냐며, 술이나 같이 먹자고 했었다. 정은창은 둥그런 눈으로 놀란 듯 하더니 이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물론 이 남자는 오늘이 자신의 생일인지 꿈에도 모를 것이었다.
“ 근데 갑자기 왠 술이야. ”
“ 왜, 지금이라도 집에 갈까 ? "
“ 내가 말을 말지. ”
강재인이 짧게 웃었다. 어느새 앞선 강재인은 정은창의 팔을 잡아끌며 한 가게로 들어섰다. 둘이 들어선 곳은 분위기 좋은 -정은창에겐 그저 어두컴컴하기만 한- 칵테일바였다.
“ 칵테일 ? ”
“ 음, 오늘 나한테 특별한 날이거든. ”
“ 특별한...날 ? ”
정은창의 되물음에 강재인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평일인 탓인지 사람은 얼마 없었다. 강재인과 정은창은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은 뒤 주문을 넣었다.-정은창은 칵테일이란 것을 입에 대어 본 적이 없으므로 강재인에게 모든 것을 맡긴 상태였다.- 강재인이 주문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과일로 장식된 잔에 빨간 빛을 띠는 액체가 둘 앞에 놓여졌다.
“ 마셔봐. 나쁘지 않을거야. ”
달면서도 약간의 알콜향이 났다. 강재인의 어떠냐는 눈빛에 정은창은 괜찮네,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근데, 오늘이 무슨 날인데 ? ”
“ 오늘 ? 아……. 내 생일. ”
“ 음 그래…, 뭐? 생일 ? ”
정은창은 건성으로 대답하다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 응, 왜 ? 난 생일도 있으면 안 돼 ? ”
“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놀랐잖아. ”
정은창은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강재인이 고개를 숙여 가볍게 웃었다. 둘은 조용히, 말없이 칵테일 잔을 비웠다. 서로의 잔이 비워지고 강재인의 주문에 따라 두 어잔 더 마시기로 했다. 강재인의 눈치를 보던 정은창이 뒷머리를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 근데 그……, 왜 하필 생일에 나랑 ? ”
“ 그냥. 은창씨랑 어제 마주치기도 했고. 혼자보단 낫잖아 ? ”
“ 그래……. ”
“ 사실 어제 은창씨랑 마주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아니면 다른 사람이랑 보낼 뻔 했잖아. ”
“ 그게 왜 다행이야 ? ”
강재인이 대답대신 그를 향해 생긋 웃었다. 그 동시에 바닥으로 뭔가 툭 떨어졌다. 그것에 먼저 시선을 던진 것은 정은창이었다. 강재인도 뒤로 떨어진것을 보았다.
“ 어 ? 내 머리핀 ! ”
둘이 동시에 허리를 숙였으나 강재인이 먼저 머리핀을 집어 들었다. 가까이 있던 밝은 색 긴 생머리가 정은창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 아, 어떡해. 망가졌어. ”
불만스런 표정을 짓던 강재인은 머리핀을 주머니에다 아무렇게나 넣었다. 강재인에 이어 정은창까지 잔을 비우자 강재인이 다른 칵테일을 두 잔 더 주문했다.
“ 한 잔만 더 하자. 어때 ? ”
“ 그래. 그러지 뭐. ”
정은창과 강재인 앞에 이번엔 파란 색의 음료가 놓아졌다. 강재인이 추천해준 음료는 대부분 그의 취향에도 맞았다. 그는 평소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 류도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오자 데워진 바깥공기가 둘을 훅 덮쳤다. 9월이라 아직은 약간 더웠다.
“ 해가 많이 짧아졌네 벌써. ”
하늘을 보던 정은창이 그녀를 향해 말을 건넸다. 강재인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늦은 시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미 붉은 노을이 성난 듯 하늘을 칠해놓고 있었다.
“ 어쨌거나 같이 술이라도 마셔줘서 고마워. ”
“ 별 말씀을. 데려다 줄게. ”
강재인의 집은 버스로 몇 정거장 떨어져 걸어가기엔 꽤 먼 거리였지만 둘은 날도 좋고, 거리도 한산해 그냥 조용히 걷기로 했다. 강재인과 나란히 걷던 정은창의 눈에 가판대가 들어왔다. 여성들의 장신구를 즐비하게 늘어놓은 채 파는 곳이었다. 정은창이 걸음을 멈추자 그제서야 강재인도 그 앞에 멈춰섰다.
“ 여긴, 왜 ? 선물할 사람이라도 있어 ? ”
정은창은 한참을 망설이더니 강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 그, 오늘 생일이라며. 머리핀도 망가졌잖아. ”
생각지 못한 그의 말에 멍하니 그를 보는 강재인을 쳐다보던 정은창이 괜히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리듯 말을 건넸다.
“ 비싼 건 아니지만, 하나 선물해 줄게. ”
그의 말에 싱긋 웃은 강재인이 둘러보다 빨간 리본에 큐빅 장식이 된 머리핀 하나를 집어들었다. 머리핀을 집어들고 정은창을 보는 강재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정은창은 그제서야 사람으로 인해 세상이 환해보인다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정은창은 머리핀을 계산하고 그녀와 다시 나란히 집으로 걸었다. 조용히 걸어 집 앞에 도착해 짧게 인사를 하고 들어가려던 강재인을 붙잡은 것은 정은창이었다.
“ 저기, 그…… 흠, 생일 축하해. ”
머뭇거리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강재인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 누군가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던 말이었다. 강재인은 불현듯 자신의 눈시울이 데워지는 것을 느꼈다.
“ 너 울어 ? 그, 갑자기 왜... ”
“ 아니, 고마워. 처음이야. 축하한다는 말... ”
강재인은 이제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울었다. 당황한 채 아무말도 못하고 조용히 그녀가 우는 것만을 바라보던 정은창이 손을 뻗어 그녀를 조용히 안은 채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렇게 강재인은 정은창의 품에 안긴 채 한참동안 눈물을 쏟아냈다.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가는 그 날의 기억에 강재인은 인상을 썼다. 안아주고 나서 무언가를 말했던 것 같기도, 웃어준 것 같기도 한데 이제는 그저 지난 날의 가물가물한 기억일 뿐이었다. 강재인이 머리핀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손으로 꾹 쥐었다가 머리를 틀어올려 핀으로 고정했다. 붉은 머리핀이 밝은색 머리를 꽉 물고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남자만 생각하면 가슴이 꽉 막히는 것이 울고만 싶어졌다. 숨조차 막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을 감은 채 호흡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오랜 기간, 이런 경험들을 반복해오며 쉽게 진정할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터득해왔다. 지금 와서야 잃은 그를 생각해서 얻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정장을 차려 입은 채 집을 나섰다. 우산을 든 하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직 어두운 밖은 가로등이 비추고 있었다. 적막이 내려앉은 골목에 젖은 바닥을 걷는 하이힐 소리가 울렸다. 그 때.
[투둑-]
머리핀이 풀리며 비내리는 물웅덩이에 처박히자 허리께까지 오는 밝은색 생머리가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돌아선 강재인이 머리핀을 향해 손을 뻗다 멈칫했다. 살짝이 숙였던 허리를 곧게 폈다. 강재인이 눈물 고인 눈으로 머리핀을 내려다보았다. 머리핀 위로 쏟아지는 비가 눈물너머 어른거렸다.곧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자 강재인에게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머리핀을 한참이나 보던 그녀가 울음을 꾹 참으며 돌아섰다. 느리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었다. 머리핀에 얽혀든 그와의 추억이 발걸음에 무겁게 달라붙었으나 끝끝내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내 그녀가 골목길을 벗어나자 그 자리에는 주인 잃은 붉은색 머리핀만이 물웅덩이에 처박힌 채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받아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