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회색도시에서 당신을 …
퇴근 길
W. 한크
횡단보도를 건너는 강재인이 표정을 굳히고 전화를 한다. 아직 멀어서 잘 들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긴장하고 대화할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비서라 해도 그 백석의 비서라면 꽤 위치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물론 회장 앞에서는 어림도 없지만. 김성식 앞에선 꼼짝도 못했던 나처럼. 나는 고개를 숙여서 모난 돌을 발로 찼다. 한 두번 튕기더니 어두운 차도 쪽으로 들어갔다.
“으아…”
정말로 오랜만에 강재인을 만난다. 전화를 끝낸 폰을 잡고 한숨을 푹 쉬는 모습이 너무 불쌍했다. 둘 다 각자 상사의 측근이다 보니 한숨 돌릴 여유랄게 있을 리가 없다. 그게 금요일이더라도 예외는 없다. 그래서 만나는 날이 거의 없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강재인 쪽이 바쁘거든. 나는 머리통을 긁적이면서 고개를 삐딱하게 옆으로 젖혔다.
그런 의미에서 얼굴이라도 보게 되는 오늘은 꽤나 성공한 날이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걸어올 때부터 그녀 주위엔 우울이 가득했었다. 전화를 끊고는 이마를 문지르고 있다. 강재인 특유의 비릿한 미소는 사라진지 오래다. 저렇게 진저리치는 걸 보면 아마 회장이라는 사람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가오는 강재인을 바라보았다. 그리 높지 않은 굽을 신었는데도 조금 휘청거리는 것 같다.
횡단보도를 건너고선 내 앞에 오자마자 내 가슴 쪽에 머리를 댔다. 팔을 두를 힘도 없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 손은 그녀의 뒤통수에, 한 손으로는 어깨에 손을 놓아서 쓰다듬었다. 천천히, 최대한 편안하게. 그러다가 살짝, 손을 풀고는 강재인이 힘이 없어 보여서 뒤로 자빠질까봐 머리 위에 얹은 손을 등 뒤로 모아서 그대로 안았다. 마음 같아서는 꽉 껴안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덥다. 그녀가 머리를 맞대고 있는 부분이 후더워지면서 점차 내 얼굴도 조금씩 뜨거워진다. 나는 강재인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급하게 머리를 흔들고 찬바람를 찾아 살짝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강재인의 파스텔 톤의 분홍색 머리카락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나와는 반대의 색깔을 가졌다. 나는 그녀가 나처럼 틱틱거리지만 조금 피곤하고 그럭저럭 행복한 줄 알았다. 하지만 반쪽이 어디 행복하겠나. 매일 살아가는 내내 마음을 졸이고 있어야할 텐데. 나는 그렇게 잡다하게 생각하면서 다시금 강재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어리광을 부리는 듯이 얼굴을 내 가슴팍에 비볐다. 조금은 괜찮아 졌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마디를 했다.
“왜, 또 뭔데? 그, 회장이라는 사람이야?” 네가 그렇게 힘든 이유야 뻔하지. 마지막 말은 삼키면서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나 나름대로 토닥거리는 어투로 말을 건넸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갔다. 딱히 숨기지 않았다.
순간 내 손 아래에서 뭔가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착각이겠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귀를 기울였다. 아, 착각이었나. 다시 조용해지네. 그래, 이 여자가 그런 소리를 낼 사람은 아니잖…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가죽 코트 앞섬이 아래로 당겨졌다. 나는 놀래서 다리에 힘이 풀리고는 무릎을 꿇을 뻔한 것을 겨우 막아냈다. 아무리 힘이 없다 해도 화낼 힘은 있는 갑다.
“그래!”
회장님이!
날! 부르시더라!
강재인은 평소의 제 답지 않고 술에 취한 것처럼 말을 쏟아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여자 오늘 괜찮나….
강재인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가다가 다시 한 번 돌아볼 정도로 큰 소리를 냈다.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손으로 그녀의 입을 가릴까 말까하다가 얌전히 있었다. 나는 강재인이 다시 말 하기 전까지 입을 다물었다. 오늘따라 화장을 안 했는지 보이는 다클써클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다리에는 힘이 없는지 내 점퍼를 잡고 겨우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보아 당장 집으로 데려가서 잠재우고 싶다.
“하….”
강재인의 한숨 소리가 시끄러운 도로의 차 소리 속에서 묻혀간다. 가느다란 한숨은 앞에 서있는 나만 들린다.
그렇게 소리를 지른 강재인은 이미 나에게서 떨어져 있다. 고개를 숙인 채, 머리 언저리를 잡고 비틀비틀거리면서 연신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어서 뻘쭘하게 서있었다. 평소였다면 이렇게 만나고서는 술 한잔하고는 내 집, 혹은 강재인 집으로 가서 휴일동안 쉬는 게 우리 둘만의 침묵의 약속 아닌 약속이다. 하지만 이번엔 뒤틀려질 것 같다.
“그럼 이젠 어떻게 할꺼야?” 비적비적한 가죽 점퍼를 입은 오늘, 괜시리 팔을 허리 쪽에 문지르면서 가만히 있어본다. 이대로 가는 건가? 강재인은 눈 위에 손을 얹고는 미동도 없었다.
“어쩌긴….”
강재인은 고개를 들 힘도 없는지 숙이고 중얼거렸다.
오늘 일로 인해서 생긴 피로보단 한 통의 전화로 인한 피로가 더 큰 것 같다. 나는 대답을 듣기전에 나는 손을 들어서 강재인의 볼따구를 덥썩 잡고는 고개를 올려서 나를 쳐다보게 만들었다.
“언제까지 땅만 볼꺼야?”
방금 만날 때부터 우리 얼굴도 안 마주쳤다고.
고개가 들려진 강재인은 나에게 힘 없는 미소를 만들어주었다. 뭐라 말을 하려다가 나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냥 덩달아 미소를 지을 뿐이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미소만으로도 충분하니깐. 강재인이 고개를 비적거리면서 내 손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서로 아무 말도 없이 계속 바라보았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는지 기다리듯이. 가로등이 살짝 어두워졌다. 강재인의 작은 웃음 소리가 그 침묵을 깼다.
“정은창씨.” 강재인의 손이 내 볼따구에 얹어졌다. 따뜻하다.
“누나에게 못하는 말이 없어요?”
연상이라고 하면 될 것을 뜬금없이 왜 누나는 무슨 누나야.. 오늘따라 왜 이래. 나는 떨떠름한 웃음을 지었다. 싫은 건아니다. 틀린 말도 아닌걸. 이 여자는 종종 자신이 한 두살 연상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데 이번에도 그런다. 뭐, 나는 강재인이 연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이 사람을 연상으로 대한다면 어색해질거 같아서, 깡패라는 이름으로 언제까지나 회피한다. 말은 어이없다는 어조인데 표정은 나를 귀여워하는 듯이 짓는다. 나는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지만 모른척하련다. 그렇게 있더라도 괜찮겠지, 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만나고 있는 내가 바보같다.
“뭐 어때,” 강재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턱을 감쌌다.
“횡단보도 앞에서 서있을 때부터 당신만 봤으니 그걸로 충분해.”
그 쪽의 따뜻한 품이 필요했어. 여전히 따뜻한 거 같아. 좋다.
“…”
“정은창씨이~” 왜, 부끄러워? 강재인은 나를 놀리듯이 옆으로 돌린 내 얼굴을 따라 같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강재인이 손 따라 가는 몸이 무너질까봐 허리 근처에 손을 얹었다. 강재인은 아마 내가 딴 곳을 쳐다보고 있었을 때 횡단보도 너머에서 나를 봤나 보다. 살짝 엇갈렸다. 뭐 어떠냐, 결국엔 눈을 맞추고 여기서 만나고 있지않나. 나는 눈동자만 돌려서 강재인을 힐끗 쳐다보다가 다시금 눈을 돌렸다. 방금 지었던 힘 없는 미소는 어느정도 괜찮아 졌는지 아까 전 보다는 해맑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척,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돌려서 제대로 쳐다보았다.
“춥잖아.”
나는 손을 들어서 강재인의 손을 내 볼에서 뗐다. 내 두손으로 얇게 뻗은 강재인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쥐었다. 아무리 따뜻하다고 한들 겨울에도 여름에도 나보다는 차갑다. 있지, 이대로 어디 들어가면 안될까, 언제까지 여기에 서 있어야해. 나는 그렇게 투덜거리려다가 말았다. 오늘따라 말이 잘 안 나온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목이 메말라서 그런지 모르겠다. 물 좀 마시고 나올껄.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움직일 생각도 없어보인다. 그냥 자신의 손을 감싸는 내 손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정은창씨, 잠시만.”
강재인은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내 손에서 빠져나가서 자신의 손목시계를 살펴보았다. 만난 지 5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방금 연락을 상기시키는 걸까, 곰곰이 생각을 하는 모습이 땋지 않은 한 쪽 머리카락이 스르륵 내려갔다. 신경도 안 쓰이는지 그냥 냅둔다.
나는 강재인의 그런 모습을 보다가 아래로 내려간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모아서 어깨 너머로 넘겼다. 강재인은 그 상태에서 고개를 들었다.
“갈꺼야?”
나는 그렇게 툭 한마디를 던졌다. 응? 강재인은 나의 질문에 놀란 모양이다. 눈을 살짝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 눈빛을 읽을 수가 없었다. 강재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왜요. 아쉬워요?”
강재인은 그렇게 말을 꺼내면서 앞으로 다가오고는 자신의 손을 내 목에 둘렀다. 흔적만 남아있는 향수가 내 어깨에 고개를 묻는 강재인을 따라 움직였다. 이 향수가 진할 때는 어떤 느낌일까. 이렇게 만날 때마다 나는 옅은 부분만 맡게 된다. 그럴 정도로 하루 종일 같이 있는 날이 없다. 물론 강재인이 편하게 있으려고 하지 않으려는 것도 있긴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목 부근을 간질거리게 한다. 그러게, 나도 아쉬워 정은창씨. 잠깐만 이렇게 껴안고 있자. 잠깐만 가만히 있어줘.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갑자기 잘 들렸다.
“그래서, 어떻게 할꺼야” 나는 대답을 하지 않는 강재인에게 다시 물었다.
“흐음….”
강재인은 살짝 고개를 돌리고 내 귀 쪽에서 고민하는 뉘앙스를 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있지 않고 둘렀던 손에 힘을 풀고 살짝 떨어졌다.
“미안해, 오늘은 같이 못 있을거 같아 은창씨.” 강재인은 아무 말없이 어쩔 수 없어, 이해해줘.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장난이 섞인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선 구겨진 코트를 탁탁 털면서 말을 꺼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약속을 파해버려서 미안해. 얇은 분홍색 코트가 조금 펴졌지만 여전히 접힌 자국이 남아있다. 나는 그 부분은 살짝 힘을 줘서 폈다. 아니 뭐, 별 수 있겠어. 그 영감이 와라면 가야지. 안그래?
“다음에 봐, 정은창씨.”
“어, 어. 어서 가. 춥다.”
택시 잡아줄까? 아냐 됐어. 근처에 버스정류장 있어. 어? 저기 온다! 어? 어! 그래, 빨리 가. 집에 가면 문자하고. 끝까지 걱정해주는 거야? 감동인걸. 간다면서! 안가? 그래요, 가요 가. 나 간다고 슬퍼하지마 정은창씨! 둘다 서로에게 끝에는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했다. 강재인은 버스를 잡는다고 뛰어갔다.
나는 멀리서 강재인이 버스를 타는 것까지 보고 등을 돌리고 집으로 걸어갔다. 오늘 같이 있지 못하는 건 예상은 했다. 안 가고 개기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가지 말라고 말했던 자신이 부끄럽다. 강재인도 가고 싶어하지 않던데 계속 잡고 있다면 미안함을 느끼게 할게 뻔하지 않은가. 애 같았다. 아연이도 이러지는 않겠어. 아연이도 유상일한테 거절당하면 어느정도 수긍하고 물러서잖아. 애만도 못하냐.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고 혼자 툴툴댔다.
금요일의 밤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바라고 갈망하는 날이다. 오늘만 지나면 즐거운 휴일이 있지 않은가. 어떤 일을 해도 내 자유이고, 내가 원하는 것들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예전이라면 아무 생각없이 보내는 하루에 불과하였다. 오늘이 가면 휴일이 오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는 조직으로 돌아가는 그런 의미 없는 날이 지나갔었다. 다행히 최근에는 권경감님 댁에서 경강님과 혜연이한테 가기도 했지만 그쪽도 시간대에 영 맞지 않아서 엇갈린다. 강재인은 더더욱 만나기 어렵고. 연락이라도 해서 다행이지. 근데 그 연락도 숨겨서 하고 있다니깐. 왜지? 왜 숨기고 있는 거야.
결론은 이렇게 오랜만에 이루어진 만남이 한 통의 전화로 종결되었다. 오늘 뭐하지? 오랜만에 일찍 잘까…. 바람이 거세다. 빨리 집에 들어가기나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