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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stalgia

W. 라마
  • 라마

그는 나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피부에 닿는 차가운 겨울 공기와 두껍게 쌓인 먼지 냄새가 아직 생생했다.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나를 보던 그의 눈빛을 떠올렸다. 호기심과 죄책감, 옅은 경멸.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했다. 그의 배려는 호의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부고 소식을 듣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사랑한 건 그가 아니라 나였다는 걸. 일상생활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더 바쁘게 일했다. 그를 잊으려 노력했다. 양 실장님. 아가씨. 정은창. 내 곁에는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의지할 곳이 없어졌다. 외롭다고 느낄 때면 그가 생각났다. 잠을 자기 전에, 양치를 하면서, 길을 걷다가도 목소리가 들렸다. 강재인. 없을 걸 알면서도 뒤를 돌아봤다.

그에게 일 년을 바쳤다. 비서 일을 하는 중에도 틈틈이 행적을 뒤졌다. 기억을 더듬어 집까지 찾아간 적도 있었다. 삼백일 호는 비어있었다. 집주인도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했다. 낡은 빌라의 계단을 내려가며 몇 번이고 뒤돌아보았다. 현관문을 열면 그가 있을 것 같았다. 골목 앞에 주저앉아 그를 떠올렸다. 당신 얼굴이 어떻게 생겼더라.

 

장 회장은 내게 새로운 일을 지시했다.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을 감시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중 스파이보다는 쉬운 일이지. 그렇게 말하던 늙은 포식자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머리가 아팠다. 신경질적으로 현관문을 닫았다. 새벽부터 내린 비 때문인지 하늘이 회색빛이었다. 이런 날이면 무언가 끊임없이 떠올랐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도 구체적인 형상은 생각나지 않았다. 잊고 산 어떠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산을 펼쳐들었다. 투명한 비닐 너머로 빗물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구두굽이 땅에 닿을 때 발목으로 튀는 물이 거슬렸다. 백석 건물은 꼭대기 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내게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감시대상에게서는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나와 만난 적 없는 사람임에도 안도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있었더라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더 이상 나의 보고로 인해 사람이 죽는 걸 원하지 않았다. 장 회장은 몇 번이고 의심하리라. 일을 끝내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사내 카페에 들러 커피라도 사 먹으려 로비로 향했다. 카페 직원은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주시겠어요. 내 말에 그녀는 짧은 대답과 함께 커피 머신을 눌렀다.

플라스틱 컵 겉면으로 물이 서렸다. 컵홀더를 끼우지 않은 탓인지 몇 번이고 손이 미끄러졌다. 비는 여전히 거세게 쏟아졌다. 잦아들 때까지 테이블에 앉아 기다릴 생각이었다. 빈자리를 찾으려 고개를 돌리던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한쪽 볼에 큰 상처가 나 있던 사람. 짙은 밤하늘 색 같기도, 잿더미 색 같기도 한 머리를 가진 사람. 어쩌면 처음 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깊은 우주를 닮은 눈은 그대로인 사람. 잊고 있었다.

“정은창?”

일순간 그의 눈이 흔들렸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네, 하고 되묻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정은창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음에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와 이토록 비슷한 분위기를 내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부고 소식을 듣고 소재를 찾던 일 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때 봤더라면 몇 번이고 되물었을지도 모른다. 잘못 봤었나 봐요. 죄송합니다. 웃으려 했지만 웃을 수 없었다. 접대용 미소는 내게 습관 같은 것이었다. 이상했다.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닌데. 컵을 제대로 쥘 수도 없을 정도로 물이 흘렀다. 급하게 몸을 돌렸다. 컵홀더는 어디서 부탁해야 하더라.

강재인.

주변이 멈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는 낯선 이의 목소리만 뇌리에 박혔다. 다리가 떨려 서 있는 것도 힘겨웠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또 다시 내 이름이 들렸다. 강재인. 그가 말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표정과 함께 손을 들어보였다. 안녕.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해. 천천히 걸어 나가는 뒷모습이 내게 돌아가라고 했던 날과 겹쳐보였다. 몇 번이고 상상하던 상황이었다. 그를 떠나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정작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정은창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된다. 접촉한 걸 들키면 그도, 나도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아. 진짜로 마지막이구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살아있는지, 김성식을 죽인 게 당신인지. 그리고 나를 사랑했는지.

“나, 당신이 보고 싶었어.”

잘 가. 끝내 못한 말을 눈물과 함께 삼켰다.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들고 있던 컵은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그는 또 나를 두고 떠났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구두 앞코엔 정체모를 액체가 한두 방울 튀어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가까워질수록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 다가오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내 앞에 멈춰 선 순간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와 같은 눈이었다. 호기심과 죄책감, 옅은 경멸. 그는 살짝 웃어보였다. 나랑 같이 도망칠까, 강재인.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투였다. 그게 말이냐고 대답하려 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들어 내 뺨을 문질렀다. 그만 울어. 그리워하던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퍽 다정했다. 그는 뺨에서 손을 뗐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했다.

“강재인, 내가 너를.”

이번에는 그 눈빛을 사랑이라 믿어도 될까.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래, 정은창. 우리 떠나자. 아무도 못 찾는 곳으로 떠나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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